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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여행 SEA NOTE 25

눈과 바다가 나란히 있던 오타루의 하루

삿포로에서 기차를 타고 오타루로 향했다. 겨울 바다와 삼각시장, 오르골당의 작은 기계들, 눈 내린 운하까지 걸어서 이어 본 하루.

눈 쌓인 창고와 물결이 보이는 저녁 오타루 운하

바다가 먼저 나타난 아침

삿포로에서 오타루로 가는 날, 처음 오래 바라본 것은 관광지 사진이 아니라 눈 덮인 철길이었다. 승강장 너머의 선로는 검은 레일 두 줄만 남기고 흰색으로 채워져 있었다. 여행을 시작할 때는 목적지에서 무엇을 볼지부터 떠올리기 쉽다. 그런데 이 아침에는 열차가 오기를 기다리는 장면부터 이미 겨울 여행의 일부가 되었다. 평소라면 지나쳤을 플랫폼의 간격과 전선, 건너편 낮은 건물까지 눈이 차례로 덮고 있었다.

눈으로 덮인 삿포로역 선로

삿포로에서 오타루행 열차를 기다리며 본 눈 덮인 선로. 검은 레일만 흰 승강장 위로 이어졌다.

열차에 올라 창밖을 보다가 바다가 나타났을 때, 오타루로 향하는 길이 갑자기 또렷해졌다. 창틀 아래에는 눈이 쌓인 해안이 길게 붙어 있고 그 뒤로 짙은 푸른 물결이 펼쳐졌다. 같은 창 안에 눈과 바다가 나란히 놓인 풍경은 사진으로 다시 봐도 낯설다. 도시를 빠져나온 뒤 바다를 스쳐 가는 구간에서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부터 한 번쯤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게 된다. 멀리 보이는 흐린 구름까지 더해져, 파란 바다가 무조건 따뜻한 풍경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차 창밖으로 보이는 눈 쌓인 해안과 겨울 바다

오타루로 가는 열차 창밖. 눈 쌓인 해안 바로 뒤에 겨울 바다가 펼쳐졌다.

오타루에 가까워지자 창밖은 다시 집과 철길의 풍경으로 바뀌었다. 플랫폼 가장자리에 쌓인 눈은 길게 잘린 케이크처럼 단면이 보였고, 그 너머에는 낮은 지붕들이 겹쳤다. 바다를 보고 난 직후라 그런지 이 조용한 역 주변도 해안 도시의 일부로 읽혔다. 오타루를 운하 사진 한 장으로 기억했다면 놓쳤을 풍경이다. 이동할 때 찍은 사진을 남겨 두길 잘했다. 나중에 하루의 순서를 되짚을 때, 어디에서 바다를 보았고 언제 다시 눈 많은 거리로 들어왔는지가 그 사진들에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오타루에 가까워진 눈 덮인 철길과 마을

오타루에 가까워진 열차에서 본 선로와 마을. 플랫폼 가장자리까지 눈이 두껍게 쌓여 있었다.

역 앞에서 먼저 만난 바다의 먹거리

오타루역에 도착한 뒤에는 역에서 가까운 삼각시장 쪽으로 걸었다. 시장 입구의 간판은 눈 사이에서도 멀리서 알아볼 수 있었다. 역을 나온 직후 곧바로 시장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 이 동선의 장점이었다. 아직 도시의 방향을 익히기도 전에 좁은 골목의 활기를 먼저 볼 수 있다. 관광 안내에서 말하는 ‘역 근처’라는 표현이 이곳에서는 꽤 실감 났다. 역 앞의 넓은 공간에서 시장의 좁은 통로로 옮겨 가는 짧은 사이에 여행의 크기가 확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눈길 끝에 보이는 오타루 삼각시장 간판

오타루역 가까이 있는 삼각시장 입구. 눈이 쌓인 길 끝에 시장 간판이 보였다.

안쪽 수조에는 커다란 게들이 겹겹이 들어 있었다. 등껍질의 점무늬와 다리의 마디가 가까이서 보이니, 메뉴판에서 보는 해산물과는 다른 인상이었다. 수조 유리에 맺힌 물방울과 조명 반사가 사진에도 남았다. 시장에서 가장 기억나는 것은 ‘무엇을 먹을까’보다 ‘바다가 이 도시의 식탁까지 어떻게 들어오는가’라는 생각이다. 아침 열차에서는 바다를 넓은 수평선으로 보았는데, 시장에서는 유리 수조 너머의 아주 구체적인 생물로 보게 됐다. 그 간격이 오타루에서 보낸 하루를 연결해 주었다.

삼각시장 수조에 모인 살아 있는 게들

삼각시장 수조 안에 모인 게들. 껍질의 무늬와 다리의 마디가 유리 너머로 선명했다.

삼각시장 수조 속 게의 등껍질과 다리

수조 가까이에서 본 게의 등껍질. 바다에서 본 풍경이 식재료의 모습으로 이어졌다.

시장에서 나와 남쪽 거리로 향할 때는 눈 때문에 걷는 속도가 자연스럽게 느려졌다. 차도 가장자리에는 치워 놓은 눈이 벽처럼 쌓여 있었고, 발밑에는 흰 눈과 젖은 길이 번갈아 나타났다. 사진 속 거리는 화려한 관광지보다 생활하는 동네에 가깝다. 건물의 간판과 전깃줄, 제설한 자국이 모두 그대로 보인다. 오타루를 걸을 계획이라면 겨울에는 지도에 표시된 거리만 보고 시간을 빡빡하게 잡지 않는 편이 좋겠다. 목적지 사이에 이런 길이 있고, 그 길을 천천히 지나는 시간이 오히려 기억에 남았다.

눈이 쌓인 오타루의 겨울 거리

시장 쪽에서 남쪽으로 걷다 만난 눈 내린 거리. 치워 놓은 눈이 길 양옆에 높이 쌓였다.

점심 한 그릇과 오르골당의 오후

한참 걸은 뒤 점심에는 해산물 덮밥을 앞에 두었다. 파란 그릇 위에 새우, 연어, 붉은 생선살, 흰 생선살, 알이 색깔별로 놓여 있었다. 사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가운데 자리 잡은 새우의 긴 수염이다. 삼각시장의 수조를 보고 나서 이 그릇을 마주하니, 아침부터 이어진 바다의 이미지가 비로소 점심상까지 연결되는 것 같았다. 이름난 곳을 몇 군데 도는 데만 마음이 쏠렸다면 식사 사진은 그저 기록 한 장으로 끝났을 것이다. 이 날의 덮밥은 이동과 걷기 사이에 잠시 앉아 하루를 끊어 주는 장면이었다.

새우와 여러 생선살이 담긴 해산물 덮밥

점심으로 마주한 해산물 덮밥. 새우와 여러 생선살, 연어알이 파란 그릇 위에 놓였다.

오후에는 오타루 오르골당 주변으로 발길을 옮겼다. 거리에서 본 일본어 간판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바깥의 눈빛과는 전혀 다른 나무색이 먼저 보인다. 진열대가 빽빽하지만 물건마다 크기와 표정이 달라 서둘러 지나가기 어렵다. 작은 장식 인형을 하나씩 들여다보다 보면 처음에는 기념품 가게 같았던 공간이 곧 여러 형태의 음악 장치를 모아 둔 곳으로 보였다. 밖에서는 눈과 바다가 하루의 배경이었다면, 안에서는 태엽과 원판 같은 작은 부품이 시선을 붙잡았다.

오타루 오르골당의 일본어 간판

거리에서 만난 ‘오타루 오르골당’ 간판. 눈길을 걷던 오후가 실내 구경으로 이어졌다.

사람 모양 오르골은 모자와 옷자락, 작은 악기까지 제각기 꾸며져 있었다. 여행지 기념품을 고를 때는 대개 물건을 빨리 훑지만, 이런 진열대 앞에서는 손바닥만 한 장식에 오래 눈이 간다. 중앙의 피아노 연주자와 양옆의 인형들을 번갈아 보니 같은 음악 상자라도 표정이 모두 달랐다. 물건을 꼭 사야만 제대로 본 것은 아니다. 구경하는 동안 내가 가장 많이 한 일은 ‘어느 모양을 고를까’보다 ‘왜 이렇게 작은 물건을 오래 바라보게 될까’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피아노 연주자 등 인형 오르골 진열대

오르골당의 인형 오르골 진열대. 피아노 앞에 앉은 인형을 중심으로 서로 다른 모양이 모여 있었다.

다른 진열대에는 토끼, 개구리, 작은 인물들을 올린 오르골이 색색으로 놓여 있었다. 한쪽은 노란 천, 다른 한쪽은 짙은 나무 선반이라 같은 방 안에서도 풍경이 계속 바뀐다. 이름과 얼굴은 한꺼번에 기억하기 어렵지만, 작은 동물들이 줄을 맞춰 앉아 있던 모습은 오래 남았다. 오르골당을 짧게만 둘러볼 생각이라면 이런 테이블 앞에서 예상보다 시간이 늘어날 수 있다. 사진을 보면 한 물건만 자세히 찍는 대신 진열대 전체를 담은 까닭도 알 것 같다. 종류가 많다는 사실 자체가 그 순간의 경험이었다.

토끼와 작은 동물 오르골이 모인 진열대

토끼와 작은 동물 오르골이 줄지어 놓인 진열대. 노란 천 위의 색들이 실내를 환하게 만들었다.

장식에서 시선을 떼고 내부 구조를 보여 주는 설명을 보니, 오르골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금속 원통과 그 옆의 가느다란 빗살 같은 부분이 사진에 나란히 있다. 장식품 뒤에 숨어 있던 구조를 알고 나면 작은 상자 하나가 같은 곡을 되풀이할 수 있는 이유도 상상하기 쉬워진다. 음악을 ‘소리 나는 기념품’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전시를 따라가며 정교하게 만들어진 기계라는 면을 발견했다. 소리를 묘사할 만한 녹음은 남기지 않았지만, 그날 오래 바라본 것이 무엇인지는 이 부품 사진 한 장이 충분히 말해 준다.

오르골의 원통과 빗살 구조를 설명하는 안내판

오르골의 원통과 빗살 구조를 보여 주는 안내판. 장식 뒤에 숨은 작동 원리를 들여다봤다.

더 큰 장치에서는 동그란 금속 원판 두 장이 상자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원판의 작은 구멍들을 보다 보니 음 하나하나가 눈에 보이는 점처럼 느껴졌다. 이어서 본 나무 상자형 장치에도 커다란 원판이 들어 있었다. 작은 인형 오르골에서 시작해 이런 물건까지 이어지는 순서가 좋았다. 같은 공간에서 장난감처럼 보이는 물건과 공예품, 기계를 차례로 만나는 셈이다. 거창한 설명을 다 읽지 않아도 크기와 재료가 달라질 때마다 구경하는 재미가 생겼다.

큰 나무 오르골 안의 두 금속 원판

나무 상자 안에 나란히 놓인 금속 원판 두 장. 빽빽한 구멍이 음악의 흔적처럼 보였다.

뚜껑을 연 대형 나무 오르골과 원판

뚜껑을 연 큰 나무 오르골. 작은 장식품과는 다른 크기의 원판과 상자가 눈에 남았다.

오르골당 밖으로 나온 뒤에도 주변 골목을 바로 떠나지 않았다. 치즈 케이크를 소개하는 작은 카드를 손에 든 사진이 있고, 조금 뒤에는 비스킷 사이에 차가운 속을 넣은 아이스 샌드 사진이 있다. 두 장을 연달아 보면 거창한 식도락 계획보다는 걷다가 눈에 들어오는 것을 하나씩 살펴본 오후에 가깝다. 특히 아이스 샌드는 눈 오는 거리를 걷는 날에 먹는 차가운 간식이라 더 기억에 남았다. 사진에는 비스킷의 얇은 층과 흰 크림, 검은 건포도 모양의 조각이 가까이 담겼다. 큰 명소 사이에 이런 작은 쉬는 시간이 들어가야 하루의 속도가 무너지지 않는다.

손에 든 치즈 케이크 안내 카드

골목에서 살펴본 치즈 케이크 안내 카드. 간식을 고르며 잠시 걸음을 멈춘 순간이다.

크림과 건포도를 넣은 마루세이 아이스 샌드

비스킷 사이에 크림과 건포도가 들어간 마루세이 아이스 샌드. 눈 내린 오후의 간식이었다.

운하로 돌아가는 길, 바다 도시의 저녁

오후가 더 깊어졌을 때는 거리의 가게에도 들어갔다. 어묵 가게 진열대에는 길쭉한 구운 어묵이 낱개로 놓여 있었다. 포장된 한 개 한 개를 보는 장면이라 여행의 큰 사건은 아니지만, 바다 도시의 먹거리가 시장 수조와 점심 한 그릇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이곳에서는 막연히 ‘해산물’이라는 말로 묶이던 것들이 게, 생선살, 어묵처럼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기념품을 찾는 손보다 사진을 찍는 눈이 먼저 반응한 것도 그래서였는지 모른다.

가게 바구니에 진열된 구운 어묵

오후에 들른 가게의 구운 어묵 진열대. 한 개씩 포장된 길쭉한 어묵이 바구니에 놓였다.

운하 쪽으로 향하는 거리에서는 건물의 표정이 또 바뀌었다. 눈에 덮인 긴 지붕 아래로 석조 외벽이 이어졌고, 차도에는 제설한 흔적이 선처럼 남아 있었다. 오르골당 내부의 따뜻한 갈색에서 밖의 회색과 흰색으로 돌아온 셈이다. 늦은 오후라 거리를 비추는 빛도 아침보다 부드러웠다. 오타루에서는 장소마다 ‘눈이 많다’는 말이 다른 장면을 뜻했다. 역에서는 선로를 덮은 눈, 골목에서는 걷는 길 옆의 눈, 운하 가까이에서는 오래된 건물의 지붕을 두껍게 누르는 눈이었다.

눈 덮인 긴 석조 건물과 제설된 도로

운하 쪽으로 걷는 길에 본 긴 석조 건물. 지붕은 흰 눈으로 덮이고 차도에는 제설 흔적이 남았다.

운하 주변에서 본 서양미술관 건물도 같은 석조 벽을 지니고 있었지만, 작은 창의 노란 불빛과 입구 장식 때문에 또 다른 표정을 띠었다. 멀리서 보면 묵직한 벽이 먼저 보이고, 가까이 가면 문 안의 빛이 눈에 들어온다. 이 길에서 건물을 찍을 때는 한 곳의 정확한 역사보다 눈, 돌, 조명이 함께 만드는 늦은 오후의 분위기에 마음이 갔다. 여행을 마치고 사진을 정리하면서도 이 벽돌과 돌의 질감이 오르골당의 나무 진열대와 묘하게 이어졌다. 건물 안과 밖 모두 오래 남는 재료의 색을 가지고 있었다.

오타루 서양미술관의 석조 외벽과 켜진 창

운하 가까이의 서양미술관 건물. 석조 외벽과 켜진 창, 지붕의 눈이 저녁빛 아래 겹쳤다.

운하에 닿기 직전, 난간 옆 눈 속의 작은 촛불을 발견했다. 하얀 눈을 파서 만든 아치 안에 불꽃 하나가 들어 있었다. 바람이 어떤 방향으로 불었는지, 누가 불을 켰는지는 사진으로 알 수 없다. 다만 넓은 운하를 보기 전에 이 작고 따뜻한 빛을 먼저 보았다는 순서는 분명하다. 같은 시간대의 사진인데도 시선을 멀리 보내기보다 발치에 머무르게 하는 장면이었다. 눈을 치워 만든 길과 달리, 여기서는 눈이 불빛을 감싸는 공간이 되었다.

운하 난간 옆 눈 속에 놓인 촛불

운하 난간 가까이 눈으로 만든 작은 등 안의 촛불. 하얀 눈 가운데 주황빛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운하를 따라 늘어선 창고 건물을 바라봤다. 지붕에는 눈이 길게 이어지고, 물 위에는 창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잘게 흔들렸다. 처음 열차 창에서 만난 바다는 수평선이 보이는 열린 풍경이었는데, 하루가 끝날 즈음 만난 물은 석조 창고와 난간 사이를 흐르는 좁은 운하였다. 둘 다 물가지만 기억하는 방식은 전혀 달랐다. 한쪽은 이동 중 잠깐 지나간 장면이고, 다른 한쪽은 멈춰 서서 건물과 물결을 함께 본 장면이다. 오타루의 하루를 한 장으로 줄일 수 없는 이유가 그 사이에 있었다.

눈 쌓인 창고와 물결이 보이는 저녁 오타루 운하

해가 기울 무렵의 오타루 운하. 눈 덮인 창고와 물 위에 비친 노란 불빛이 한 화면에 들어왔다.

돌아보면 이날의 동선은 어렵지 않았다. 삿포로에서 열차를 타고 바다를 지나 오타루역에 내린 다음, 가까운 시장을 보고 눈길을 걸어 점심과 오르골당 주변을 즐겼다. 늦은 오후에는 다시 운하 쪽으로 걸으며 석조 건물과 물가를 보았다. 이 순서가 좋았던 까닭은 명소를 많이 찍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장면이 자연스럽게 이어졌기 때문이다. 창밖의 바다, 시장의 수조, 해산물 한 그릇, 태엽이 든 작은 상자, 그리고 저녁 운하까지. 사진을 펼쳐 놓으면 그 연결이 더 분명해진다. 겨울의 오타루는 목적지에 도착한 순간보다 그 사이를 천천히 걸은 시간으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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