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4일의 삼척은 한 가지 색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아침에 갈남의 작은 만에서 본 바다는 아직 잠이 덜 깬 듯한 회청색이었고, 장호에 이르자 물 밑의 돌까지 드러나는 맑은 청록으로 바뀌었다. 초곡의 해안길에서는 수평선이 한층 짙어졌으며, 오후 미인폭포 앞에서는 바다와 전혀 다른 우윳빛 푸른색을 만났다. 한 지역을 하루 동안 돌아다녔을 뿐인데, 파란색 견본집을 몇 장이나 넘긴 기분이었다. 그래서 이 여행의 순서를 기억할 때는 장소 이름보다 색이 먼저 떠오른다.
갈남, 아침을 조금 일찍 훔쳐 온 포구
갈남에 닿은 시각은 아침 일곱 시 전이었다. 넓은 백사장을 찾아온 여행자라면 이 작은 포구를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을 앞에 서니 바위 위로 소나무가 한 그루 삐죽 올라온 풍경이 먼저 발목을 잡았다. 바다는 그 바위 양옆으로 조용히 접혀 들어왔고, 좁은 모래밭에는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소란 대신 파도 소리만 남아 있었다. 잠깐 둘러보고 출발하겠다는 계획은 여기서부터 틀어졌다. 여행에서 가장 자주 틀어지는 계획이 ‘잠깐’이라는 사실을 또 확인했다.

차에서 내릴 때는 바람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바닷가로 한 발 더 나가자 모자 챙이 먼저 반응했다. 사진 한 장 찍겠다고 모자를 눌러 쓰고 자세를 고쳐 잡는 모습이 꽤 우스웠을 것이다. 나만 애쓰는 사이 소나무는 바위 위에서 태연했다. 그 무심함이 마음에 들어 한동안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멋진 전망대를 찾는 것보다, 마음에 드는 바위 하나를 발견하고 그 주변을 서성이는 쪽이 내 여행에는 더 잘 맞는다.

포구 쪽으로 걸으면 작은 조형물과 마을의 지붕, 방파제 끝의 빨간 등대가 차례로 눈에 들어온다. 갈남은 풍경을 한 번에 ‘완성된 엽서’처럼 내놓지 않는다. 고개를 조금 돌릴 때마다 어선이 놓인 자리와 집들이 바다를 감싸는 모양이 달라진다. 한편에서는 관광지의 아침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누군가의 평범한 생활이 막 시작되는 시각이라는 점도 좋았다. 그래서 카메라를 들고도 괜히 걸음이 느려졌다. 여기서는 좋은 사진을 건지는 일보다 마을의 아침을 방해하지 않고 지나가는 일이 더 중요하게 느껴졌다.


갈남을 떠날 때가 되어서야 ‘오늘은 바다를 여러 군데 보러 가는 날’이라는 사실이 다시 생각났다. 시작부터 오래 머물렀으니 뒤의 일정이 조금 밀리겠지만, 그런 계산은 이미 별 의미가 없었다. 아침의 포구에서 배운 첫 번째 요령은 마음에 드는 풍경을 만나면 시간을 재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을 믿고 여행 계획을 짜면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적어도 이날의 나는 그 낭패를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장호항, 물속이 먼저 말을 거는 곳
갈남에서 장호로 옮기자 풍경의 속도가 달라졌다. 장호항에는 어구와 배, 바다를 따라 난 길이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온다. 포구의 생활감은 그대로인데 물빛은 훨씬 투명해 보였다. 바위 사이로 좁게 열린 물길을 보고 있으면 저 틈으로 바다가 들고나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싶어진다. 맑다는 말은 흔하지만, 장호에서는 그 말이 적당했다. 돌 주변의 물이 어떻게 깊어지는지 눈으로 따라갈 수 있을 만큼 층이 보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곤란한 일이 생겼다. 길 위에서 ‘조금만 더 가면 다른 각도에서 보일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시작된 것이다. 여행 중 가장 위험한 문장 가운데 하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돌아올 길이 제법 길어진다. 그래도 장호에서는 그 유혹에 넘어갈 만했다. 앞쪽 바위가 뒤쪽 바위를 가렸다가, 몇 걸음 뒤에는 바다를 한 조각 더 열어 주었다. 같은 항구를 여러 번 찍고 있는 줄 알았는데 사진을 넘겨 보니 물길마다 표정이 달랐다.

난간에 앉은 갈매기를 만났을 때는 나 혼자 잠시 안내를 받는 기분이었다. 녀석은 친절한 설명 대신 바다 쪽을 바라보는 시범만 보였다. 나도 따라 멈춰 섰다. 바닷가에서 쉴 때 꼭 의자나 카페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난간 하나, 눈앞에 펼쳐진 물, 잠깐의 침묵이면 충분할 때가 있다. 장호에서 기억에 남은 건 특별한 체험을 했다는 기록보다 그 짧은 정지에 가깝다.

바위섬을 지나 해안을 따라 걷자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물길과 포구 안쪽에서 보던 물결이 서로 다른 장면처럼 느껴졌다. 이 구간에서는 사진을 찍으려고 멈추는 일과 그냥 걷고 싶어서 멈추는 일이 번갈아 일어났다. 화면에 담으면 선이 예쁜 곳이 있고, 화면 바깥의 소리와 바람 때문에 좋아지는 곳도 있다. 장호는 후자까지 챙겨야 아깝지 않은 곳이었다. 오래 앉아 있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다음 장소에 대한 기대가 발걸음을 다시 밀었다.


초곡, 바다가 만든 무대 위를 걷다
오전 아홉 시를 넘겨 초곡용굴촛대바위길에 들어섰다. 이곳의 재미는 걸어 들어갈수록 커진다. 해안의 굴곡을 따라 길이 돌아가고, 어느 순간 출렁다리와 바위 기둥이 나타난다. 멀리서 보면 쉽게 지나갈 수 있을 듯한 길인데, 막상 발을 올리면 자꾸 아래와 옆을 번갈아 보게 된다. 바위틈으로 들어온 바닷물이 눈에 띄게 푸르고, 그 푸름을 둘러싼 암벽은 의외로 거칠다. 곱게 단장한 관광지라기보다 바다가 오래 공들여 만든 야외 무대에 사람이 조심스럽게 길을 얹은 느낌이다.

출렁다리 앞에서는 괜히 걸음을 늦췄다. 무서워서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설명했지만,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내 발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다리를 건너며 아래를 한 번 보고, 다시 멀리 수평선을 보면 몸의 감각도 조금 바뀐다. 발밑의 바다는 좁고 깊게 보이는데 시선을 들면 끝이 없다. 이 둘을 같은 자리에서 번갈아 볼 수 있다는 게 초곡 해안길의 묘미였다. 멋있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어, 잠깐만’ 하고 멈추게 되는 장소다.


길을 따라가다 촛대처럼 선 바위를 만났을 때는 이름 붙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바위가 어떻게 저 자리에 남았는지, 파도는 얼마나 긴 시간을 들여 주위를 깎았는지 생각하다가 금세 그런 궁금증을 내려놓았다. 여행 중에는 설명을 다 알아야만 좋은 풍경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눈앞의 모양을 오래 바라보다 보면 궁금해지는 일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사진으로 보면 작은 기둥처럼 보여도 현장에서는 주변 바위와 물길까지 함께 봐야 그 존재감이 살아난다.


해안길의 끝부분에서는 바다가 다시 넓어졌다. 방금 전까지는 바위와 바위 사이의 물색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어느새 시야를 채우는 것은 수평선이었다. 한 장소 안에서 시선이 확대되었다 축소되는 리듬이 있다. 초곡을 급하게 ‘촛대바위 사진 한 장’으로 끝내면 이 리듬을 놓치기 쉽다. 돌아오는 길에는 처음 보지 못했던 해안의 굴곡이 또 보였다. 같은 길을 왕복했는데도 돌아갈 때의 풍경이 새로워, 내가 아까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봤는지 잠깐 의심했다.


바닷가 길은 날씨에 따라 분위기가 크게 달라진다. 이날은 걸으면서 바위와 물빛을 충분히 볼 수 있었지만, 다음에 온다면 출발 전에 길의 개방 여부와 날씨부터 확인하고 싶다. 특히 바다가 좋아 보일수록 걷는 길의 상태를 먼저 살피는 편이 마음 편하다. 초곡에서 얻은 것은 사진 여러 장과, 아름다운 곳에서는 오히려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는 단순한 교훈이었다.
임원항, 풍경보다 젓가락이 빨라진 시간
초곡을 뒤로한 뒤 임원항 쪽으로 내려가 점심을 먹었다. 아침부터 바닷가를 돌아다니면 배고픔도 바닷바람을 타고 빨리 오는 모양이다. 횟집 앞 수조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선을 구경할 때까지만 해도 제법 침착했다. 그런데 접시가 상에 놓이자 풍경 감상가의 표정은 금방 사라졌다. 사진을 찍자고 젓가락을 잠깐 내려놓은 시간이 그날 점심의 가장 긴 인내였다. 바다가 아름답다는 말은 많지만, 배가 고플 때 바다 가까이서 먹는 점심의 설득력도 만만치 않다.


식탁에는 회와 곁들임이 놓였다. 무엇을 얼마나 먹었는지 계산하기보다, 아침부터 걸으며 쌓인 허기를 천천히 풀었다는 기억이 선명하다. 한 점 먹고 나면 방금 지나온 초곡의 바위가 생각났고, 다음 한 점에서는 장호의 물빛이 떠올랐다. 점심을 이렇게 엄숙하게 회상할 일인가 싶지만, 좋은 여행에서는 식사가 앞뒤 풍경을 이어 주는 쉼표가 된다. 식당 안으로 들어오니 바닷바람에 흐트러진 머리도, 조금씩 무거워진 다리도 그제야 존재를 알렸다.


계획표만 보면 여기서 바다 한 곳을 더 보는 편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날은 방향을 틀었다. 이미 아침부터 바다의 밝고 짙은 파랑을 충분히 보았고, 오후에는 삼척 안쪽의 다른 물을 보고 싶어졌다. 점심을 마치고 해안에서 멀어질 때 조금 아쉽기도 했다. 좋은 장소를 떠날 때 생기는 아쉬움은 여행을 망치는 감정이 아니라, 다음에 다시 오게 만드는 작은 예약금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다를 등지고 산으로, 그리고 미인폭포
차창 바깥의 모양이 달라졌다. 바다와 방파제 대신 산비탈의 바위와 나무가 지나갔다. 여름의 해안에서는 눈이 멀리까지 트였는데 안쪽으로 들어가니 시선이 다시 가까운 경사면을 따라갔다. 오전 내내 바다의 수평선을 기준으로 움직이던 몸이 산길의 굽이를 받아들이는 데 잠깐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중간에 보인 바위산도 여행의 중요한 장면으로 남았다. 목적지만 잇는 점선 사이에 실제로는 이런 전환이 있다.

도계 쪽 미인폭포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한 시 반을 넘겼다. 안내판을 지나 숲길로 들어서자 아침부터 따라다니던 소금기 섞인 바람이 사라졌다. 나무 그늘과 협곡의 벽이 가까워지고 물소리가 방향을 알려 주었다. 바다에서는 물을 멀리 보았는데 여기서는 물을 찾아 아래로 내려갔다. 목적지에 닿기도 전에 여행의 감각이 완전히 바뀌는 구간이었다. 내려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올라올 때의 나를 아직 만나기 전이었으니까.


폭포를 처음 봤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높이보다 물빛이었다. 바다의 투명한 청록과는 다르게, 이쪽은 마치 물에 우유 한 방울을 섞은 듯 뿌연 파랑이었다. 선글라스를 벗었다가 다시 써 봤다. 색이 바뀌지 않았다. 오전에 파란 바다를 세 군데나 보고 왔는데도 오후의 파랑 앞에서 다시 초행자가 되었다. 폭포 아래에 모인 물은 주변의 어두운 암벽과 대비되어 더 환하게 보였고, 흐르는 부분과 고인 부분도 서로 다른 농도를 가진 듯했다.


폭포 가까이에서 한 번 더 올려다보고, 물이 흘러가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가까운 풍경에서는 바위의 결이 살아 있고, 한 걸음 물러나면 협곡이 폭포를 감싸는 전체 모양이 보인다. 앞에 서 있는 동안 휴대전화 화면으로 확인하는 시간보다 실제로 물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었다. 사진은 나중에 색을 기억하게 도와주겠지만, 물소리와 서늘한 느낌은 그 자리에 서 있어야만 받을 수 있었다. 욕심껏 여러 장을 찍고도 한동안 카메라를 내린 채 서 있었다.


아까 장호에서 물속의 돌이 보일 만큼 맑다고 느꼈다면, 이곳에서는 무엇이 물빛을 이렇게 보이게 하는지 궁금했다. 정확한 이유를 단정하는 대신 눈앞의 차이를 즐기기로 했다. 낮 동안 같은 삼척에서 본 두 물은 닮은 듯 전혀 달랐다. 하나는 햇빛과 바위 사이를 통과하는 투명한 바다였고, 다른 하나는 협곡 바닥에 빛을 모아 둔 듯한 폭포의 웅덩이였다. 어디가 더 예쁘냐는 질문에는 답하기 어렵다. 바다를 보고 나서 폭포를 봤기 때문에 이 대비가 더 또렷하게 남았으니까.


돌아 나올 때는 아침 갈남에서 세웠던 ‘잠깐만 보고 가자’는 약속이 떠올랐다. 하루 내내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포구에서는 마을을 한 번 더 돌아봤고, 장호에서는 물길을 따라 조금 더 걸었고, 초곡에서는 돌아오는 길마저 새로웠고, 미인폭포에서는 발길을 돌리기 전에 다시 한 번 뒤를 봤다. 여행을 잘했다는 생각은 유명한 장소를 빠짐없이 찍었을 때보다, 떠나기 아까운 순간이 여러 번 생겼을 때 드는 것 같다.

되돌아 오르는 길에서는 다리가 비로소 하루의 거리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아침의 나는 폭포에 가면 시원할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오후의 나는 시원함에도 왕복 계단값이 붙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숨을 고르며 돌아본 협곡의 색이 좋아 투덜거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날의 마지막 파랑을 한 번 더 눈에 넣고 올라왔다. 바다를 보러 간 날에 산속 폭포가 결말이 될 줄은 몰랐지만, 그래서 더 오래 기억할 만한 하루가 되었다.
다시 떠난다면
이 동선을 다시 걷는다면 아침에는 갈남과 장호에서 서두르지 않고, 초곡 해안길에는 걷기 편한 신발을 신고 가겠다. 점심을 먹고 내륙으로 향할 때는 바다에서 폭포까지 이동하는 시간을 넉넉히 잡을 생각이다. 네 곳 모두 ‘도착해서 사진을 찍는 시간’보다 그 사이를 걷고 멈춰 서는 시간이 중요했다. 바람이나 비가 있는 날에는 해안길과 폭포 탐방로의 현장 안내도 먼저 확인해야겠다. 여행을 다녀온 뒤 가장 남는 정보는 그런 작은 여유의 필요성이다.
여행 사진을 정리하며 재미있었던 것은 물빛이 변한 순서만이 아니다. 아침에는 작고 조용한 것을 오래 들여다봤고, 한낮에는 넓게 펼쳐진 바다 앞에서 걸음이 빨라졌다. 점심 뒤에는 다시 그늘과 물소리를 찾아 속도를 늦췄다. 장소를 많이 다녔지만 결국 같은 하루 안에서 내 걸음의 속도를 몇 번이나 바꾼 셈이다. 다음에 삼척을 찾는다면 새로운 장소를 더 보태기보다, 이날 오래 머물지 못한 갈남의 아침이나 장호의 난간 앞에서 시간을 조금 더 써 보고 싶다. 파란색은 충분히 봤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오고 나니 아직 못 본 빛이 있을 것 같다.